하나님의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말씀 창세기 6-7장
요절 창세기 6:13,14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11년만에 한국 날씨가 40도에 육박하고 온도 계량이후 최고점을 찍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의 날씨와 다른 홍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크게 두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과연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이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죄와 형벌의 평가뿐 아니라 인생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포함됩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심판, 나를 향한 심판이 있습니까? 만약 세상을 향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무엇이 달라집니까?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한 노아는 지혜로운 삶입니까? 세상에서 손해보고 조롱받는 것에 그치는 것입니까? 이 두가지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6:1-7)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을 믿는 신자를 말하며 사람의 딸들이란 믿지 않는 불신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믿지 않는 불신자 딸들의 외적인 아름다움, 즉 얼굴과 몸매를 보고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들이었으나 상대방의 인격이나 신앙보다는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결혼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형제들은 예쁜 여자라면 사죽을 못쓰는 것 같습니다. 아뭏튼 자매들은 형제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니까 더 예뻐지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이면 기초화장, make-up base, 색조 화장을 정성스럽게 하였습니다. 또 저녁이면 오이마사지, 머드팩으로 얼굴 털뽑기, 스팀찜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야한 옷차림을 하고 형제들에게 눈웃음을 치며 돌아 다녔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자매들을 한 번 꼬셔서 놀아볼까 하는 음흉한 눈길로 이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형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동물처럼 육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보이지 않지만 정신과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영혼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여러 가지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 젊은이들은 예쁜 자매를 찾아 잘생긴 형제를 찾아 연애하고 결혼하는 일에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또 그 시대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이란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용사’란 뜻입니다. 이들은 근육을 자랑하고 폭력적인 자들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볼 때 이들은 맘에 안들면 부수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창4:23). 자신의 강함을 나타내고 사람을 죽이는 강포와 무자비함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죄악이 가득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죄를 추구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했다는 것은, 항상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계획만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잘때까지 어떻게 하면 나의 욕구를 채울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여러명의 아내를 두고 더 즐기는 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욕하고 때리고 죽이는 일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면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에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7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세상의 죄악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어디까지 악해질지 두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보통 부모들은 어찌하든지 그 자식을 살리고자 합니다. 자식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받으면 어떡하든지 도와주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와 관계성을 회복하고 그의 회개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가인이 회개하셨을때도 다른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고 증표를 주어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시대에도 사람들을 참으며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하고 사명대로 살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극한의 쾌락을 추구했고, 뼈속부터 패역하여 모든 생각이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육신이 되어 동물과 같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중대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탄하시며 노아 시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진행하셨습니다.
II. 구원의 방주 (6:8-7장)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런 죄악되고 패역한 시대에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먼저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시편 1편에서 의인이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육체의 쾌락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즐거움을 삼았습니다.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고 좋아 밤과 낮으로 음미하고 묵상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노아는 그 시대에 완전한 자라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생활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이 없었음을 말합니다.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부인을 놔두고 애인을 사귈 때 1부1처의 정절을 지켰습니다(10). 마지막으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말합니다. 노아는 동네 영감들이 주말이면 쌍쌍파티도 가고 부루스 추러 갈 때 먼저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동네 영감들이 같이 가지고 꼬시면 그들을 오히려 말씀공부에 초청했습니다. 이처럼 노아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던 시대에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시대에 이런 노아 한 사람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임박한 홍수 심판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13,14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너를 위하여 구원의 방주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면 이 방주의 설계도는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재료는 반드시 고페르나무 즉, 삼나무로만 짓도록 하였고 크기는 길이 140m, 폭 23m, 높이 13.5m로 축구장 크기만한 대형 선박입니다. 전체 모양은 약간 두툼하고 기다란 널빤지 형태입니다. 또 방수를 위해 역청을 칠하도록 하였고, 환풍을 위해 창문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이같은 방주의 모양이 물 위에 안전하게 떠 있기에는 가장 적합한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와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6:21절과 7:1절 사이에는 약 100년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본문의 22절은 100년 동안 노아의 행적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하였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 짧은 한 마디에는 100년간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흘린 모든 땀과 눈물과 기도가 베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기까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이 미치광이 영감아’ 사람들의 끊임없는 조롱을 참아야 했습니다. 동네 꼬마들마저 그를 보고 놀려댈 때면 당장 내려가서 망치로 머리통을 한 대씩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때론 망치질하다가 3층에서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파스를 붙이고 며칠을 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어려움보다도 내면을 파고드는 의심과 회의는 더욱 그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꼭 이렇게 크게 지어야 하는가’ ‘고페르 나무 말고 마트에서 편리하게 구할수 있는 합판으로 지으면 않되난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진을 뽑아 역청만드는 일이 힘들면 공업용 본드로 하기 싶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40도 넘는 폭엽에 내리쬐는 태양을 보면서 ‘지금까지 그런 비가 내린적이 없는데, 과연 과학적으로 지구를 다 덮을만한 비가 오는 것이 가능한가? 내가 나이가 많아 헛것을 들은 것은 아닌가?’ 의심도 들었습니다. ‘만약 심판이 없다면 지나가버린 내 인생은 어디서 보상받는가’, ‘아이들과 사모님의 희생은 어디서 보상받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마다 노아는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믿음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고페르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 노아는 말씀을 대뇌이면서 다시 힘을 얻어 힘차게 망치질을 시작하였습니다. 쾅! 쾅! 쾅! 노아의 힘찬 망치 소리는 죄악과 쾌락에 깊이 잠든 그 시대를 향해 준엄한 하나님의 경고소리와도 같이 울려 퍼졌습니다. 마침내 노아의 방주는 완성되었습니다.
7:1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생물들을 한쌍씩 방주로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요한 적막 가운에 7일이 흘렀습니다.
7:11,12절을 보십시오.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2월 17일은 사람들에게 운명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도 자매들은 얼굴을 화장을 짙게 하고 야한 차림에 길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갑자기 쿵 쿵 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곧 이어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었습니다. 아줌마들은 서둘러 옥상에 널린 빨래를 거두었습니다. 동시에 굵은 빗줄기가 주룩 주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놀러 나왔던 사람들은 옷을 뒤집어 쓰고 귀가를 서둘렀습니다. 오전내내 쏟아지던 비가 오후에는 장대비로 변하더니 저녁부터는 바께스로 퍼붓듯 쏟아졌습니다. 순식간에 늘어나 낮은 지대의 집들부터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국가 비상상태가 선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차에 최소한에 짐을 싣고 고속도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도로가 잠겨 어디로도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63빌딩으로 달렸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63빌딩도 저층부터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10층이 잠기더니 이내 50층까지 물이 올라왔습니다. 60층까지 올라온 물세가 빠른 속도로 물이 불어났고, 삼킬 듯이 소용돌이 치며 차올라왔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제야 두려움에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그들은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아무도 방주에 탈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돈도, 명예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10미터 높은 해일이 옥상에 이르렀고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 모두 한순간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7장 22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몸매를 뽐내던 자매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쾌락을 즐기던 형제들, 근육을 자랑하던 네피림, 노아를 조롱하던 사람들, 모두 물속으로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모든 육체가 전멸할때까지 거센 물살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방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방주 안에 있던 자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홍수 심판과 노아 방주 사건의 전말로 지금으로부터 4,500년전 이 지구 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히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를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아담아 내가 어디에 있느냐’ 안타까워 하며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 하지 않을 때 결국 그를 심판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일생 땀을 흘리면 일하고 종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를 즉각 심판하기 보다 가인의 회개를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가인은 일생 동생을 죽인 죄책감으로 고통하며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극적 성적 타락과 폭력이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에 오셔서 의인 5명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의인 5명이 없음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수천도의 유황비로 그 지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오래 참으시지만 회개 없이 끝까지 죄를 품고 있을 때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홍수심판은 장차 올 최후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노아 시대 못지 않게 음란하고 강포합니다. 얼마전에는 자취하던 20대 여성4명이 다른 1명을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개월동안 집단폭행해 사망케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같은 20대 또래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또 성적으로 타락하여 원조교제, 여대생 매춘이 사회문제로 이미 오래 전에 대두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얼마 전에는 동물을 복제하더니 이제는 사람을 복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의학계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만 없다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계속 복제하여 장기이식수술을 함으로 거의 불로장생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제 사람들의 죄악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마치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위험천만한 질주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시대에 장차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벧후 3:6-7은 말씀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첫 번 노아 심판은 물심판이었지만 이제 다가올 마지막 심판은 불심판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늘은 불에 타서 풀어지고 땅은 뜨거운 불에 녹아 없어집니다. 땅이 불에 녹아 무너져 내리는대 때 좋은 자동차와 집, 우리의 직장이 우리를 지켜 줄수 있을까요? 고후 5:10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결국 마지막 심판대 앞에 단독자로 홀로 서서 자신이 일생 행한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삶의 마지막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참으로 나는 활과 같고 흐르는 시냇물과도 같습니다. 아침이 되면 낮이 오고, 낮이 지나면 어두운 밤이 곧 찾아옵니다. 피끓던 청춘 시절도 다 지나고 곧 어두운 인생의 황혼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꼭 늙은 노인이 되어야 인생을 마감하라는 법도 없습니다. 우리 신수 UBF에서도 대학생때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졸업하기 전에 소천하신 분이 있으십니다. 도적과 같은 죽음은 새파란 젊은이의 꽃다운 목숨도 사정없이 앗아갑니다. 이 인생에는 재수도 없고 삼수도 없습니다. 단 1번 뿐이며, 한 번 죽으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6:13,1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세지말에 노아와 같이 구원의 방주 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새 구원의 방주로서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죄악되어 나의 선한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피흘리심을 믿을 때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다. 이는 남녀 노소 차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선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치스러울수록 더 많은 가격이 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아마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영혼일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생명과 영혼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겸손히 그 구원의 복음 앞에 나아와 영접할 때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산길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저는 올해 집을사서 도배하고 장판을 새로 해서 깨끗한 상태로 입주를 했습니다. 65인치 TV를 켜고 거실 쇼파에 앉아 창문을 열면 북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의 초막을 여기에 지어 편안히 있고 싶었습니다. 회사에서도 어느정도 인정을 받아 그냥 저냥 적당히 하면서 무난하게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심심하면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집대출을 생각하면서 재테크 정보가 나오면 이리저리 찾는등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 일을 섬기서 무슨 열매가 있었나… 지금까지 빈그물입니다. 저는 말고 아이들이 바르게 컸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할수 있는게 없습니다. 부족합니다.’ 하며 포기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이번 수양회 창세기 3장 말씀을 통해 사단이 간교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을 잊고 변질시키고 끊임없이 의심과 회의를 심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제가 스스로 회의에 빠져 아무것도 아니다, 의미없다 내려 놓은 것을 회개합니다. 다시금 말씀을 읽고 기도의 감당하는 방주짓는 삶을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과 개개인의 삶에 대한 심판도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노아와 같이 방주를 지으며 이를 따라 사는 믿음의 삶을 축복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한번뿐인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가치있고 지혜로운 삶 방주를 만들고 준비하는 삶을 살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