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여름수양회-2] 아브라함의 믿음

[2017여름수양회 말씀-2] 주제1강 아브라함의 믿음

말씀 : 히브리서 11:8~16
요절 : 히브리서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때부터 매년 배워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믿음의 길을 가장 먼저 걸어간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똑같이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면 마음 한구석에 ‘나는 아들을 못바쳤고 지금도 드릴 이삭이 없으며 지금까지 뭔가 크게 한건 터트려서 인정받은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 집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아브라함을 다시한번 생각해보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PART 1. 갈바를 알지 못하고
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라고 불리우는 메소포타미아 곧 갈대아의 수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직업은 우상을 만드는 것이었고 데라는 다른 신을 섬겼다고 여호수아서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가내수공업으로 작업을 했을 것이고 아브람도 아버지를 도와 우상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할 때 아버지와 결별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브람이 아버지와 다른 신앙을 갖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브람의 상황은 쉽게 말해서 불교가정에서 나고 자라서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람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으로 나아갔습니다. 가는 도중 갈대아와 가나안의 경계에 있는 하란에 멈춰서 거기에 거하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순종하여 가나안을 향했고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스토리를 8절 한문장으로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이것을 믿음으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람에 대해 ‘믿었다’ 라는 단어를 언급하는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그돌라오멜을 물리친 후 보복 받을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대로 자손이 없이 죽는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있을때 하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시며 자손에 대한 확신을 아브람에게 심으셨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렇다면 믿었다라는 표현을 할만큼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한 것은 15장입니다. 그 전에는 그만한 믿음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믿음의 절정인 이삭을 바치는 상황은 한참 뒤인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12장에서 아브람을 부르실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아브라함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라는 단어를 써서 아브람이 가나안을 향해 갔다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가나안으로 갈때의 ‘믿음으로’라는 단어와 17절에서 이삭을 드릴때의 ‘믿음으로’라는 단어의 강도는 다른데도 똑같이 ‘믿음으로’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개념을 이해하고자 할 때 처음에는 한문장으로 정의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립되지 않은 것을 배울때에는 ‘A는 B다’라고 배우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심화과정에 들어갈때는 그것이 각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더 깊이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주입식 교육에서 사고를 요구하는 교육으로 넘어갑니다. 이바울 목자님은 성경공부를 할 때 우리에게 더욱 생각해보도록 요구하십니다. ‘왜 그럴까 더 생각해 봅시다’, ‘또 다른것은 뭐가 있을까’라고 계속 질문하시는데 내가 답을 알고 있지만 답을 모르는 것같은 상황에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 이라는 단어를 쓸때에는 ‘이삭을 바친 믿음’이 바로 떠오르고 ‘믿음’이라는 의미는 곧 ‘이삭 바치기’로 묶여버립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8절부터 19절에 언급되는 아브라함의 모든 행동에 대해 ‘이삭을 바치는 믿음의 수준’에서 그 행동을 했다고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때 얼마나 확고하고 간절하게 순종했고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단호하게 떠났는지 강조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르를 떠날때 우상을 다 때려 부수고 출발했으며 가나안을 향해 갈때의 위험하지만 모든것을 무릅쓰고 통과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매우 강하고 절대적이었다라는 것으로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은 창세기 15장 앞에 있습니다. 그가 순종하였으나 그의 믿음은 차이가 있습니다. 8절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합니다. 도착할 곳도 정확히 모르고 도착해서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르며 내가 맞게 가고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황에서 가나안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신, 불도저같은 추진력이 없다고 혼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으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동일하게 표현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삶에 적용할 때 주로 어떠한 일을 이루어가는데 쓰이는 도구로 언급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간절함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결연한 의지의 강도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었을 때 우리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잣대로 아브라함의 삶을 다시한번 보면 그 열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가뭄이 들었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단호하게 남아있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두번이나 아내를 동생이라고 하며 위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신다고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셨을 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였고 사라도 웃으면서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라고 하며 불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이 모든 과정을 것을 총합해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사라는’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으로’라고 말하는 경우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과거를 잠깐 돌아보면 좋을것 같습니다. 각자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모태신앙인 사람도 있고 전혀 안믿는 집안에서 아브라함처럼 불러낸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님들의 초청에 센터를 방문하거나 진리에 대한 갈망에 동아리방을 방문하였습니다. 말씀공부 하자는 말씀에 호기심 반, 간절함 반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고 인생에 어떤 전환점이 되는지 몰랐지만 그 꼬투리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센터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이삭을 바치러 왔습니다’라고 하는 양은 없었을 것입니다. 각자가 부르심을 영접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시작에 대해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다’고 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기록하신 우리의 역사책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집을 떠나 장막생활을 한 것은 어떻습니까? 믿음과 섬김을 배우고자 함께 부대끼며 살고 매일 아침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를 외치며 장막을 출발해 각자의 삶을 싸우러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장막에서 생활하였고’라고 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잘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삭을 바친 믿음’이 반사적으로 머리속에서 떠오르면서 ‘내가 바칠 이삭’, ‘한방에 인정받는 믿음’을 나에게서 찾습니다. 나는 한방 터트릴것도 없고 바칠 이삭도 없고 지금 뭐하고 사는지도 모르겠고 평생 이렇게 살다가 가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중압감으로 눌리게 됩니다. 이삭이 내 인생 한구석에 있는데 내가 발견을 못한게 아닌가 하며 눈을 부릅뜨고 찾습니다. 찾게되면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로 칼을 들고 설칩니다. 이러한 방식의 주체는 내가 중심이 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백성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의지로 진행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성되는 계획 입니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의지, 열심, 의, 책임으로 완성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완성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계획에 가장 먼저 초청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 계획을 영접하고 그 계획을 믿고 그 계획을 품고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첫번째 사람이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의지가 부족했고 확신이 부족했으며 좌충우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가장 먼저 걸어가며 결국 이삭을 주신것을 체험하였습니다. ‘후손을 많이 세우려면 먼저 자식이 필요합니다’라는 간절한 믿음과 의지에 감동해서 자식을 보상으로 얻은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지 못했지만 결국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 자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든 믿어서 자식 얻은것은 같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시작되었고 누가 근거가 되며 누구의 공로이며 누구의 책임인지는 명확하게 다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라는 단어를 쓰면 우리가 근거가 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라는 단어를 쓰면 하나님이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근거가 된다면 우리의 믿음의 강도나 결과보다도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이 주가 됩니다. 우리가 믿고 그 길에 동참하는가 믿지 않고 벗어나는가가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봅니다. ‘이삭을 바쳐야 한다’라는 의미는 ‘자식이 없는 인고의 세월을 거치고 자식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고 여러 문제를 통해 결국 이삭을 받았으며 이삭을 믿음으로 키웠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거기까지 거쳤다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주도로 만들어가시는 것이지 내가 이삭을 먼저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송으로 불러주신 소원의 가사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17절의 믿음의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는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수준입니다. 조그마한 순종을 하며 하루하루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워가며 결국 이삭을 바치는 수준까지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체험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이삭을 바쳐야한다는 단순함에 눌립니다.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 배웠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며 너희에게 무엇이 있는가 물으셨고 오병이어밖에 없지만 그것을 받아 축사하시고 나눠주심으로 모두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 방식이 우리를 세워가시고 키워가시는 방법입니다. 맨 처음 어리버리한 아브라함을 이끌어내시고 그에게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결국 이삭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의 길을 따라간다면 오병이어와 같은 방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시달려서 파김치가 된 몸과 작은 짜투리 시간과 상한 마음, 깨어진 마음을 순종함으로 들고 나아갔을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고 결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보다 우리의 현재를 인정하고 오늘의 가진것을 내어놓으면 됩니다. ‘별것 아닌데요’라고 하며 내놓을 때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그것이 쓰이는 것을 체험하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를 아브라함만큼 키우실 능력이 있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벌써 두줄 쓰셨습니다.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았다’라고 두줄 쓰셨습니다. 오늘 하루 드릴 오병이어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볼 때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도 거기까지 키워가고 계신다는 신뢰와 확신을 갖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Part 2. 본향을 사모하는 자
13, 14절을 보십시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아브라함도 자신의 본향을 찾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거하였습니다. 본향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향은 그가 소속되어 있는 곳입니다. 저번 설교때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수동 주민, 대흥동 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대흥동으로 이사 오면서 저의 관심사는 신수동에서 대흥동으로 옮겨왔습니다. 이와 같이 본향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고 그들의 관심사가 있는 곳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이방종교 집안에 있다가 불려나와 하나님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몰랐으나 초청받았고 믿음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었으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이고 어떤 권리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임을 알았고 그것을 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는다면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외국인이고 나그네가 됩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에 이 땅에 속한 나라 뿐 아니라 이 땅에 대해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가보다 도대체 그 나라의 권리와 의무와 혜택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에 거하였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불편을 감수한 것을 높게 쳐줍니다. 3대가 불편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며 우리도 현실에서 겪는 불편을 이렇게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외국인, 나그네, 본향 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소속과 지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목축업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거부가 되었습니다. 두개를 합하면 아브라함은 비싸고 좋은 장막에 거하며 목축업을 하였다가 됩니다. ‘그가 검소하게 살았다’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나그네로 살았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득 수준에 맞는 좋은 장막에 거하였을 것입니다. 이렇다고 가정하면 현실에 대해 투쟁을 하는 모습이 아니라서 김이 빠집니다. 우리의 시선은 고생의 문제 이전에 어디에 속했는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었음에도 가나안의 땅을 사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단지 무덤 하나를 사서 그곳에 묻혔을 뿐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을 사서 소유하는 것이 아브라함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고 자신은 하나님의 성에 속하였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주시고자 하시는 가나안 땅이 현실의 땅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힘이 닫는데까지 열심히 땅을 사서 모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은 지금의 가나안이 아니었기에 철저하게 땅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6절 하반절을 보십시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서의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믿음으로’라는 단어를 붙이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없을때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함 가운데 믿음의 선진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수준이든 상관이 없다. 내가 택하고 내가 세운다. 그렇게 선 사람들의 하나님인것이 자랑스럽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의 궁극적인 사건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의 하나님이 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은 결과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펼쳐놓으신 은혜를 영접하고 따르기에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새롭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 사모하였습니다. 본향에 대해 사모하였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가운데 서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새롭고 기존의 나라와 다르며 하나님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법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지 인식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담대하게 살 수 있는지 얼마나 자유 가운데 살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알아가며 투철한 시민정신을 가지고 시민 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배워가는 것이 의무이기 전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는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천국 본향에 가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힘과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 맛을 볼수록 우리는 이땅에 대해 이방인이 되고 본향에 대해 시민이 되어갈 것입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것이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통치 가운데 거할 때 자연스럽게 강해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생각할 때 부담감이 드십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떠올릴때 아브라함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장해가는 믿음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안믿는 가정, 안믿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뭣도 모르고 따라 나왔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나그네요, 세상을 향해 살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통치를 맛보고 알게 모르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만 간절해집니다. 잘 따라오셨습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이삭을 주시고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것까지 인도해나가실 것입니다. 앞으로의 삶이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그 믿음의 수준이 소망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 수준에 맞는 훈련을 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없던 삶처럼 우리의 문제 가운데 우리의 애간장을 다 녹이실 것입니다. 이삭을 주신다는 약속앞에 사라가 웃은것처럼 우리를 어이없고 믿기 어려운 상황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삭을 주신것처럼 우리에게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고 놀라워하며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이삭을 바치는 믿음의 수준까지 우리가 설 것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의 믿음이 없음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믿음을 키워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키워내신 하나님, UBF 역사 가운데 좋은 선배들을 키워내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키워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41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은 어려워보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인구절벽이 시작될텐데 선교사도 줄면 어떻게 하나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뤄가실 역사에 믿음으로 기대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때까지 하나님이 키워가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3대가 함께 사역지를 지켰고 믿음으로 새 센터를 개척했다’는 역사의 한줄을 더 써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이삭이 없으면 없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죽은자 같으면 죽은자 같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하루하루 나의 작음을 알며 그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을 갖고 나의 길을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잘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바보같고 갈바를 알지 못하고 어리지만 약속의 땅 위에서 잘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인생이 되어가는 것을 바라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을 소망하며 힘내서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삶을 돌아봅니다. 이번에는 ‘1975년에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맨손으로 시작해서 갖은 직업을 겪으시며 악착같이 사셨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많이 떠들었고 많이 딴청을 피웠으며 토요일 성경공부 시간에도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다가 들어갔습니다. 어느날은 오락을 늦게까지 하다가 성경공부 중간에 참석했는데 그때부터 졸기 시작해서 이를 본 목사님이 탁자를 탁 치셨습니다. 잠은 깼습니다. 그래도 3남매가 같이 교회에 갔기 때문에 예배는 꾸준히 드렸습니다. 고등학교때에도 예배 드리고 오후에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였습니다. 서강대 특차 합격자 발표날 김웨슬리 목자님을 만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매주 졸았습니다.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94학번들이 94년 수양회때 댄스를 하고 있을때 저는 아웃사이더로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오전에 교회를 가고 오후에 UBF 2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몇번 나가다가 나가지 않았고 UBF 예배도 겨우 참석했습니다. 한번은 박다윗 목자님께서 오후에 말씀을 전하는데 혼자 참석해서 혼자 졸기도 했습니다. 영적인 빠릿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 쯤에는 UBF의 예배도 빠지곤 했습니다. 일요일 오전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앉아서 지금 뭐하고 있는가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대학교를 5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병역특례를 다닐 때에도 신앙생활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애매했습니다. 그 때 사회를 맡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빠지면 백업이 없기 때문에 빠질 수 가 없어서 강제로 꾸준히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날은 사회를 보며 말씀교독을 하는데 도중에 서서 존 적이 있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 놀란 사건이었습니다. 말씀을 요약해서 헌금기도를 해야하는데 말씀시간에 졸아서 뭘로 기도해야할지 난감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약을 해서 기도를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말씀에 집중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성장하였습니다. 병역특례를 마치고 백수로 지내면서 수양회때 발표할 인생소감을 쓰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이제는 어떤 훈련을 시키시던지 잘 감당하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믿었다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회사생활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피할길을 주시고 들었다 놨다 하시며 이를 통해 충성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라 목자님과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믿음이 소망이를 얻고 현재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제대로 양을 친적이 별로 없고 뭔가 뚜렸하게 한방을 터트린 것도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실망할까요? 실망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저와 현재의 저를 비교하면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말할 정도로 다릅니다. 아무도 제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아웃사이더였지만 제 의지가 아닌 그냥 어쩌다보니 인도하심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의지, 추진력, 결단력 같은 단어가 없음에도 성장하였습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이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도해오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도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라고 제 입으로 자주 말하지만 그 가운데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이삭을 바칠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에 대해 나그네의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세워질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소망을 가지고 살며 2041년 10만명 중의 한 사람으로 살 소망을 가지고 목자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의 원천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루하루 오병이어를 드리며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수준을 ‘아브라함의 믿음’까지 높여가시는 그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오늘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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