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2016년 양평 여름 수양회 제 3강
본문 : 마가복음 2:13 ~ 2:17
요절 : 2:14
성경 본문: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허무한 것을 따르는 우리 인생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새 힘을 덧입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리에 대한 설명)
예수님이 사역을 처음 시작하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기에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했는데, 세리는 바로 이 로마에 낼 세금을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한민국도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기까지 약 35년간 일본의 속국으로 살았습니다. 일본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해방 후 71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국민들 사이에 있는 것을 볼 때, 로마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증오와 미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이 내는 세금은 수입의 1% 내는 소득세, 수출, 수입을 하게 되면 내는 관세, 곡물세, 포도주에 붙는 주세, 긴급할 때 내는 특별세 등 중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 세금을 걷는 권한을 경매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biding 금액을 제시하는 토착민에게 세금을 거두는 권리는 팔았습니다. 이는 토착민들의 수익이 어디서 나는 지를 결국 토착민들 출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을 활용한 로마의 지능적인 전략이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리를 산 유대인 세리는 그 권한을 이용해서 법에 정한 범위 내로 세금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바칠 세금 이상이 거둬지면 모두 자기가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세리들은 사람들로부터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둬들인 후, 로마에 일부를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에 착복함으로써 부자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세가지 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첫째는 공개적으로 로마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착취하는 로마의 앞잡이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싫어했습니다. 둘째는,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과 친했습니다. 이는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고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린 자였습니다. 공개적으로 돈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떠나 다른 길로 나아간 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돈을 위해 하나님과 민족을 버린 더러운 배신자)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세리는 곧 죄인과 동일한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회당, 즉 이스라엘 사회,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던 회당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내쫓았습니다. 재판의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가족 중에 세리가 있을 경우 가문의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어찌보면 세리는 돈 때문에, 물질적인 안정 때문에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요, 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레위는 후에 제자 마태가 됩니다. 마태는 바로 그런 세리였습니다.
(마태를 부르신 것에 대한 전반적인 서사)
오늘 말씀의 풍경을 한번 마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까요.
마태는 그날도 세금을 걷는 부스에 출근하여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앉아 있는 세관으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늘 그랬듯이 마태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자 그는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의 고개를 떨구고 바쁜 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던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갑자기 그의 앞에서 멈춰섰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사람들의 눈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조심스레 그는 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어느 젊은 사람이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즉시 바로 그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고개를 돌려 자기 주변을 바라보았지만, 세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 예수라는 분이 자기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 두려움과 놀람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세리요 죄인인 자신을 향해 비슷한 말씀을 하실 것도 같았습니다. 그를 꾸짖고 정죄하여 본보기로 삼을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 저 세리를 보십시요. 저 사람같이 로마의 개로 살지 마십시요. 세리야,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느니라!”
그러나, 그러나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 예수라는 사람은 자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자신 앞에 서 있던 그 예수는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 머리 속에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난 세리인데… 세관은 어쩌지?, 근데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거지?, 멀리 가실 건가?”
그러나, 그에게는 동시에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로 지금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졌습니다. 더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는 저기 저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죄인이었고, 세관을 지킬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권능을 느꼈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의 부르심이 마태의 심령을 깊이 진동시켰습니다.
세리 마태는 그 즉시 일어나 세관 부스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뒤에 섰습니다. 세관을 버리고, 세리를 버렸습니다. 세상의 안정을 던져 버리고 영원한 안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가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선택한 순간 그는 그 동안 세상에서 느낄 수 없었던 큰 자유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와 마음에 차고 넘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세리 레위는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어떤 사람이 적합한가?)
그레이 하운드라는 개를 아시나요? 어깨높이 70cm 정도되고, 몸무게는 30kg 정도되는 대형견입니다. 이 개는 개 중에서 가장 빠른데 최고속도 70km 까지 달리는 개입니다. 자연히 생긴 것이 키가 크고 늘씬하게 생겼습니다. 공원에서 가끔 산책 나온 이 개를 보면 주변에 푸들이나 치와와나 불독 등 다른 모든 개들이 다 똥개같이 보입니다. 이 개로 말미암아 헐렁한 무릎 늘어진 체육복에 모자를 눌러 쓰고 나온 주인도 웬지 품격이 있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갈릴리 해변에서 자라셨던 예수님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저기 목포에서 자란 시골 출신이 서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려야 하는 것과 비슷할까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전을 정결케하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소명의 길을 같이 걸어갈 열두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뽑는 것이 좋을까요? 여러분이라면 그러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누구를 그 일을 돕는 제자로 뽑을 것입니까? 성경을 잘 알고, 어려서부터 훌륭하게 교육 받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청년들이 좋지 않을까요?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좋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 멋지고 존경할 만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뽑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기왕이면 갈릴리 지역 가버나움 촌 구석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뽑으시면 더 좋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곳곳에 벽보를 붙이는 거죠.
세상을 바꿀 최고의 인재를 구함, 외모는 상관 없으나 성경을 잘 알고 스펙도 좋아야 함,. 헤롯 왕가,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 대환영!!!
열두명의 촉망받는 바리새 출신 젊은 정치가들과 박식하고 똑똑한 서기관들, 그리고 권문 세족인 헤롯 왕가 출신들로 구성된 멋진 드림팀 제자들이 예루살렘 거리를 예수님과 함께 거닐면서 말씀을 거침없이 전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요. 마치 그레이 하운드를 데리고 다니는 주인처럼 훨씬 멋지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자를 부르셨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던 지역은 갈릴리 지역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평안남북도 쯤 됩니다. 오랑캐의 침략으로 순혈을 많이 잃어버린 평안도와 같이, 갈릴리도 잦은 이방 세력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순수 혈통을 잃어버리고 잡족들로 섞인지 오래된 지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도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하고, 그 이방인의 땅 갈릴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러운 피가 섞인 곳, 멸시받는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거기서 자라셨고, 그 지역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였고요, 바다에서 그물 던지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도 지역 어부였고 해변가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불렀습니다. 그들과 함께 또 형, 동생들도 오고요, 주변 친구도 데리고 왔습니다. 가버나움 촌뜨기 어부들과 그 친구들, 그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기초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로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시 이스라엘에서 더러운 죄인으로 버림받고 천대받던 세리, 갈릴리 지역 세리까지 자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가장 거룩하신 자가 돈을 사랑하여 민족을 버리고 배신했던 자를 제자로 불러 함께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이제 세리와 죄인과 같이 다니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정죄하고 욕하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멋지게 폼나는 드림팀 제자들을 만드는 것이나, 그들을 이용해 정치적인 세력을 구성하는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길이지 예수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박수받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로 채우는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변방에 있는 자들을 택하시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런 자 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있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따를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신 뜻 – 리더가 되라는 것이 아님)
여러분 중에 누구를 졸졸 따르는 것에 익숙하신 분 계십니까? 저도 한때 학창 시절에, 전교 1등을 하는 아이들을 따라하곤 했습니다. 공부하는 방법도 따라해 보고, 웃을 때도 같이 웃고, 심지어 재채기까지 따라해 보았는데 내가 이거 지금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그만뒀습니다. 오늘날 시대는 따를 사람, 따를 만한 사람이 많지 않는 시대입니다. 더군다나 따를 사람이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더더욱 없죠.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모두다 누구를 따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주인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삽니다. 혹은 이 세상이 찍어내는 대로, 요구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대다수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 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를 찾으라는 목소리, 혹은 리더가 되라는 목소리가 인기인 시대입니다. 서점에 가면 온통 리더십에 대한 책입니다. 교보문고 서점 사이트에 가서 “리더”라고 검색하면 9909 건의 책들이 검색됩니다. 그런데 팔로워라고 검색하면 39권의 책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조직에서 가장 꼭대기, 즉 사람들을 부리고, 사람들을 좌지 우지하고, 조직의 이익을 가장 많이 챙겨 갈 수 있는 리더, 누구나 빛나는 리더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Jesus Follower, 즉 예수님을 따르는 종교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십시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쫓았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말씀에 세리 마태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양의 가장 큰 특징은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고전 11:1]
세상은 온통 “너 하고 싶은대로 해!!!”, 혹은 “리더가 되라, 리더가 되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따라가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리더보다 따르려 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실 때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셨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믿음의 세계로 부르실 때에 초월적인 사랑과 긍휼과 은혜의 기준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마태를 부르신 이 본문을 문맥적으로 잘 살펴보면 마태는 이미 심령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들을 섬세하게 도우시는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실 때에는 “나를 따르라” 한마디만 하셨고,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따랐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는 오늘 본문의 마태와 같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며 “하나님, 나는 남의 것을 빼앗고, 불의를 저지르고, 간음을 하는 저 죄인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나는 7일에 두 번 금식하고 또 월급의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고 있습니다” 라며 자신이 의롭게 살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 중에 세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마태는 겉보기에는 악한 죄인이었지만, 그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는 아픔과 고통을 곱씹으며 어둠 속에서 울부짖으며, 오히려 간절히 하나님을 찾던 영혼이었습니다. 가버나움 해변가에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애워싸고 따라오고 있었지만, 저 멀리 세관에 홀로 앉은 마태의 마음을 예수님은 아시고, 보신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세리로서의 삶, 돈과 물질적인 안정을 위해 하나님과 민족을 버린 죄책감, 그로인한 자신의 어두운 인생으로 말미암아 깊은 고통으로 날마다 날마다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회당장들에게는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그에게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며 손가락질 하였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제자로 부르시기에 합당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태를, 그 마태의 중심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둘러싼 그 많은 무리들 아닙니다. 자신을 의인이고 예수님이 필요 없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 아닙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격을 갖춘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2장 17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장 17절]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죄와 고통 가운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찾으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책 Religious Affections, 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은 상한 심령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로 보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일평생 섬기고 사역의 말미에 기록한 디모데전서에서 그는 자신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여러분 이 말씀이 공감이 되나요? 일평생 주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한 바울,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던 그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고후 11:23~27]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오시면 오실 수록 내면의 죄는 더욱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시간 우리 안에 비춰 우리가 마태와 같이 죄인으로 하나님을 찾는 중에 예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따르나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존하기에 바쁜 것 같아요. 그 속에서 결국 돈이 자기를 지켜 준다고 믿게되고, 돈을 따릅니다. 성공과 성취가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쫓고요, 육체의 쾌락을 따라가는 자들도 많습니다. 인맥이,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하여 사람들을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길을 가셨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본받지 말고”, suschématizó(슈스케이마티조) 라는 이 그리스어는 틀이나 형상에서 찍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대는 마치 붕어빵 틀에서 찍혀 내듯이 사람을 만듭니다. 대학생들 모두가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원하고요, 결혼하면 모두가 더 넓고 좋은 아파트를 원하고요, 높은 연봉을 원하고요, 어르신들은 건강, 백년 장수를 원합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교 보내려고 강남 대치동엔 수많은 돈들과 아이들이 왔다갔다합니다. TV나 매스컴에서는 예쁜 걸그룹을 향해서 박수를 치고, 더 크고, 더 이쁘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사람들은 달려갑니다. 돈을 사랑하고, 이를 위해 정의과 공의를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대에 붕어빵 틀에서 찍혀 나오는 붕어빵 처럼, 이 시대가 찍어내는 틀에 찍혀져 나오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보이는 세상의 것에 안주하여,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불신자였다가 예수님을 잘 믿는 어떤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분 직업이 감평사라고 감정평가사인데, 부동산을 평가하여 공시지가를 선정하는 직업입니다. 이 감평사의 평가가 그 부동산을 소유한 회사의 담보 대출 가능 액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어느날 이분이 어느 회사 소유의 부동산 평가를 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갔습니다. 전날밤 모텔에 묵고 있는데그 회사 사장이 봉투 가득 만원권 돈뭉치를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새 돈도 아니고 허름한 돈으로 바꿔서 은행의 현금 추적이 힘들게 한 돈뭉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감평사에게 봉투를 건내며 하는 말이 …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 평가가 저희 회사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감평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 잘 봐드려야죠. 잘 봐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그런데, 이 돈봉투는 조금 일찍 가져오시지… 제가 예수님 믿기 전에 말입니다. 지금은 제가 이미 교회 다닙니다. 그래서 이 봉투를 제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라며 그 돈봉투를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그 돈 봉투를 가지고 온 사장에게 한 마디의 말도 전도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장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깊은 영혼의 울림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내미는 자신의 영혼이 초라하게 느껴젔을 것이고, 그렇게 살면 안된다 라는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눈앞에 지금 있는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다른 울림을 사람들에게 주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세상의 것들을 따라 정신없이 살아가다가도, 문득 문득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공허감으로 괴로워 합니다. 가볍게, 생각없이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도 문득문득, 인생의 진지한 문제가 떠오릅니다. 인생의 고난 앞에서,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그저 끝없이 거대한 우주 안에 존재하는 작은 하나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진지하게 영원의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병과, 죽음, 절망의 문턱에서 아득히 멀어져 갈 때, 자신은 죽음 이후의 영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일평생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인생의 한없는 가벼움을 아십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영원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과 비슷하게 칼과 창에 혹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신촌에서 자동차로 20분만 달리면 양화진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죽은 선교사들이 무덤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가치를 죽음으로 소리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 예수는 생명과 인생을 바쳐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도, 부귀와 권세로도, 안정과 행복으로도 이 그리스도 예수를 살 수 없고 바꿀 수 없습니다. 마태에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쫓을 만한 주님이셨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것이 최우선인 삶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공허하고, 헛된 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또한 예수님은 부르심 가운데 연약하여 그 길 위에 넘어지고 쓰려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다시한번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나를 따르라”
(인생 소감)
저는 대학교 1학년 칠암산 여름 수양회 때, 예수님을 구주로 뜨겁게 영접했습니다. 열등감과 정욕, 여러 공포증으로 심신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회 부적응자 였던 저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시고 구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수양회 이 후 캠퍼스에 올랐을 때 온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길가던 꽃이 웃고, 나무들이 손짓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자, 옛 동아리 사람들은 저를 불쌍히 생각하고 자기도 모태 신앙인데 교회 안다면서, 술자리에서 울면서 저에게 기독교 동아리에서 빠져 나오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저에게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 해 가을 수양회 때에 저는 저의 목자셨던 Sunny Koh 선교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저의 어린 시절을 아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셨고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적인 부부 싸움을 하던 가정을 겪었던 어린 저를 하나님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심령 깊이 임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하염 없이 눈물이 솟아 올라 영문도 모른 채 몇 시간을 울기만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은혜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선서를 하고 젊은 지성인 복음 사역, 대학생 선교 사역에 자신을 드리고자 헌신하고 결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다른 목자님들은 잘만하시는 전도를 지지리도 못했습니다. 한날은 전도를 위해 교회 기도실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C관 칡나무 덩쿨 아래 잠자고 있는 형제가 기도 중에 보였습니다. 설마설마 없겠지, 없으면 좋겠다 하고 올라갔는데 정말 거기 어떤 형제가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뜨고 있는 사람도 전도를 잘 못하는데,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전도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냥 내려갈까 말까, 옆에서 한참동안을 머뭇머뭇 거리고 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C관 식당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전도하라고 하신 사람인데 못해서 너무 죄송해서 저만치 뒤 따라 C관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복학생 쯤 되보이는 선배는 졸린 눈을 하고 C관 구석에 털석 앉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 하나님이 보여주셨으면 복음을 영접할 기회를 주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쭈뼛쭈뼛 다가가서 “혹시 예수님 믿으세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졸린 눈으로 온 얼굴에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얼굴에서 바깥쪽으로 휙 휘둘렀습니다. 그 손짓에 제 마음도 휙 날라갔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연약한 그릇을 어디다 쓰시려구요… ”
저는 시무룩하게 캠퍼스를 내려왔습니다.
저는 사람을 피하고 혼자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로 다니길 좋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즐겁게, 행복하게, 웃으며 세상을 해쳐나가는 것보다는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하나님께 소명에 대해 회의하며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캠퍼스 목자로 부르신 것이 맞습니까? 끊임없는 회의가 저를 오래도록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가 많은 HeeJung 목자님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3 개월만에 편도선이 부어서 간 병원에서 갑상선에 암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니다. 저는 왜 이런 고난을 받게 하시는 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하며 부르짖고, 눅눅한 기도원 외딴 기도실 시멘트 바닥에서도 부르짖었고, 야밤에 기도원 공동 묘지에서도 무릎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있는 것 같았고 가까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저와 HeeJung 목자에게 계속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많은 동역자들의 합심 기도의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점점 믿음이 자라 저희는 배 속에 있는 딸 아이의 이름을 치료하다 라는 히브리어인 “Rapha”라고 짓고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치료 과정 중에서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 수술 전의 공포를 견디며 “약들어갑니다…” 라는 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잃는 것도 참을 만했습니다.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차폐실에서 3일간 혼자 지내며 방사능 약과 수많은 물들을 들이키는 것도 참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밀려오는 하나님을 향한 서운함은 저의 가슴 깊은 곳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시는 것 같아. 나를 예전처럼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시는거 같애… 사랑하신다면 왜 이리 큰 고통을 당하게 하시겠어… 나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버려진 자가 아닐까…”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 저는 사랑하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마치 응석을 부리는 아이처럼… 하나님 저를 버리지 마세요. 더 사랑해 주시고, 더 깊이 만나 주세요. 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다른 길을 가더라도 저는 은혜만 주신다면 그리스도를 버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라 가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등질 때에도 저는 주님의 길을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님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자였습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다시 얻은 인생입니다. 내가 연약하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문제 없으니, 내가 여호수아와 같이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전 재산을 팔아 그리스도께서 계신 교회를 밭으로 산 자입니다. 저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장 값진 진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산 자입니다.
병역특례로 다니고 있던 회사가 분당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이직 위해 기도하고 했습니다. 요회에서 40일간 매일 밤 10시에 모여 합심 기도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이직을 이야기하니 허락을 했다가, 며칠 후 괴씸죄로 한달 안에 안나가면 자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꼼짝없이 군대에 가야했습니다. 면접을 보고 불가능에 가까운 병역특례 이직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40일 기도 모임이 끝나갈 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시고 합격을 확신하게 하셨습니다. 며칠 후 면접 본 OOOOO 라는 회사에서 합격 소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히 기도 제목으로 잡은 데로 월 70 받던 병특에서 연봉 3천을 받는 병특 군인이 되게 하시고, 저의 직업의 새로운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다 세상에서 성공해 보고자 하는 욕심으로, 회사를 뛰쳐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하였습니다. 고위 공직자의 줄을 이용해서 벤쳐를 공동 창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사람 막대기로 저를 깊이 훈련하게 하셨습니다. 1년을 그렇게 고난 속에서 성숙하게 하시고 사업과 벤처를 경험하고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저의 부족함을 사용하사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범석 목자님을 좋은 개발자요 동역자로 서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목자님께서 섬기시던 OOO 형제를 회사에 취직하게 하시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몸담고 있던 벤처가 사세가 기울어 이직을 해야했습니다. 저희 가정은 기도했습니다. 세 아이를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들을 기를 수 있는 충분한 연봉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내면의 연약함을 승리할 수 있는 회사, 히트작을 만들 수 있는 회사, 그리고 해외 선교의 발판이요 세계적인 엔지니어로 성장할 수 있는 회사로 옮기고자 매일 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희가 기도 제목과 딱 맞을 거라고 생각했던 외국계 기업은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성공해 보고자 박차고 나왔던 회사인 OOOOO에서 입사 제의가 들어오고 재차 삼차 계속 연락이 오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다시 돌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직을 하게 되면서 저희는 정확히 기도한 연봉을 받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전 직장 대비 그렇게 올려 받을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입사 시에 개발자가 하고 싶어서 개발자로 들어갔고 1년 반 동안 개발자로 충분히 성장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이전 팀장이 갑자기 퇴사하게 되어 상부의 지시로 다시 떠밀려 팀장이 되었습니다. 팀장이고 팀을 움직여 Product을 개발하여 오픈 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OOOOO를 뛰쳐 나갈 때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리, 제가 연약하여, 스스로 미끄러져 떠난 축복의 자리에 저를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연약하여 부르심 가운데서도 크게 확신이 없던 자였습니다. 주변에 지난 20년간 많은 목자 후보들이 부르심을 버리고 세상으로 혹은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났습니다. 가장 먼저 떠날 듯 했던 부적응자인 제가 어떻게 된것이 19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몸된 교회, 이 작은 교회의 지체로 섬기고, 또 섬김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연약한 것을 통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학부 2학년 때부터 찬양 인도 서브 기타로 섬겨야 했었습니다. 긴장하여 손가락을 덜덜 떨며 기타를 쳤었고, 찬양 중에 긴장하여 얼굴은 굳어서 보는 사람을 부담스럽게 했습니다. 때마다 이 작은 캠퍼스 동아리를 섬기는 것이 저의 부르심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교회들로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연얀한 나는 이런 곳이랑 맞지 않다. 이런 것들이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찬양을 섬기고, 기도를 섬기고, 건축을 섬기고, 2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1:1을 하고, 교제하고, 저를 통해 사람들을 직장에 세워주시며 하나님은 저를 당신의 교회 안에서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인생을 사용하여 주시고 매때마다 내면을 은혜로 채워주시고 세상 가운데 떠내려 가지 않고 잡아 주셨습니다.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워 할 때마다 예수님의 가벼운 짐을 섬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교회가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강건하여 굳건한 자나, 쓰러지고 연약하여 넘어져 있는 지체들이나 모두가 그리스도의 귀한 몸임을 알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섬김이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작고, 큰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사람을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 큰 교회, 큰 은혜 보다, 이 작은 교회, 작은 사역, 그늘진 곳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을 때, 훗날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날에 하나님이 저에게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니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이제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라… ”
라고 말씀해 주실 소망이 생겼습니다. 작은 교회여서 수고하여야 하고, 메마름과 은혜가 부족함 속에서 오히려 기도하고, 그 부족한 것이 보이면 오히려 품어 주고, 또 연약한 것이 보일 때는 사랑해주는 것을 통해 저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고 살아 계심을 소망 중에 바라봅니다.
병에 걸렸을 때 저는 하나님이 저를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제자 선서)
하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한다.
하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성서 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
일평생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그 마음도 연약함과 세상 욕심 속에서 한동안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의 고난을 통해 저에게 믿음과 그리스도의 율례를 배우게, 겸손히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저희 가정에 귀한 세명의 자녀를 맡겨 주셨습니다. 직장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도로 인도해 주심을 분명하게 보게 하셨습니다. 베스트의 회사들로 옮겨 주사 기술과 경영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십자가 사랑이 보이고,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늘 마음으로 보이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에 지치지 않게 은혜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실패한 자리에도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말씀을 감당하면서 저는 그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또한 병이나 연약함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과 같지 않아서, 부르신 당신의 제자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당신을 따르는 제자로 부르십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에 그 죄인을 찾으십니다. 우리 각자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인생들을 의지하지 마십시요. 세상의 헛된 길을 따르는 것을 버리십시요.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축복된 인생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진정 복되고 복된 길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thoughts on “[여름수양회-4] 나를 따르라”
감동~~~~~(ㅜ.ㅠ);;;
내가 연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
감동적인 말씀과 소감에 많은 은혜를 받네요
주님의 은혜 안에서 더욱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한 거 같네요
그래서 우리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