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며칠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 하나 있습니다.
링크는 여기 : http://www.devpia.com/Maeul/Contents/Detail.aspx?BoardID=69&MAEULNo=28&no=24676&ref=24676

간단히 말하자면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로그램 관련 회사에 신입으로 취업했는데 수습기간동안 해결해보라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어서 고민인 상황’입니다.
컴퓨터공학과를 나왔지만 소질도 없고 대학때도 전공과 무관한것들로 학점을 채워서 개발과는 완전히 생소한 상황입니다.
신입으로 왔으면 잘 알려주고 키워줄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검색해서 답을 찾아내라고만 하는게 어렵다고 합니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이 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있는데 적절한 것 같습니다.

학교 졸업까지 별 문제도 없었고 (자격증도 따고) 선배들 경험담은 일 별로 안어렵다고 하고 열심히 해서 어렵다는 입사도 통과했는데
쉽다던 일은 무슨 얘긴지 전혀 모르겠는데 나보다 퀄 떨어진다고 생각한 애들은 잘하고 상급자들은 별 이유도 없이 때려치라고 한다
암만 생각해도 내 능력 노력이 딸리진 않고 쟤들이 하는 걸 보면 무슨 ‘스킬’ 같은 걸 얻었나 본데 그 스킬 어디서 구하는지 개발 코뮤니티에 물었더니 꼰대들이 가르쳐 줄 생각은 않고 까기만 한다
나한테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는 거 보니 무슨 비급 같은 건가 본데 이건 정의롭지 못하다 나도 그 비급만 얻으면 내일이라도 잘나갈텐데
라고 생각하면 억울할 만도 하지 -_-;;

위 글들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말씀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였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복음 10장 17~22절)

이 이야기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으나 이번에는 ‘한다’ vs ‘따른다’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회사에서 고생하는 신입처럼 누가복음의 한 사람도 비법을 알고싶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라는 것을 다 했는데 영생이 없다. 도대체 여기에는 어떤 비법이 있는것인가? 책을 하나 더 보면 되는것인가? 뭔가 예배를 더 드리고 기도를 더 많이 하면 되는것인가?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머리 위에서 ‘LEVEL UP’이라는 글자가 뾰로롱 하고 올라가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진화하였습니다. 이번 레벨업의 보상으로 영생이 지급됩니다.’라는 텍스트가 눈앞에 지나가는 것인가?
예수님은 이렇게 어려워하는 그에게 가진것을 다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진것을 다 팔아서 나눠주는 것’이 비법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기에 재물이 메인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메인이 됩니다. 물론 이 사람은 재산을 나눠주라는 말 앞에서 ‘한다’의 한계만을 체감하고 돌아갔지만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신것은 ‘따른다’였습니다.
청년은 ‘했다’라는 명확함에 기초하고 싶었습니다. 말씀을 지켰고 하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어떠한 지위를 얻어갔습니다. 영생도 그러한 방식으로 얻을 수 있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따르는게 될까요? 어떻게 하면 따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따르고 있나요? 형체가 없어서 애매합니다.

십계명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말씀 앞에 ‘한다’로 접근하면 ‘몇m 이상 걷지 말아야 한다’, ‘몇kg 이상 들지 말아야 한다’,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로 접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명확하지만 원래의 의도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말씀 앞에 ‘따른다’로 접근하면 모든 것에 대해서 ‘방향이 맞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십계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죄와 병때문에 안식이 없었던 사람에게 안식을 주심으로 안식일에 걷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을 주는 것이 원래 의도임을 보이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한다’로 평가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에 왜 안식을 주었느냐?’라는 모순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율법을 지키고자 몸부림을 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한다’를 우선하였기 때문입니다. 했는가 안했는가를 가장 우선으로 따졌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평가를 ‘한다’로 결정하게 된다면 삶이 딱딱해지게 됩니다. 거기에 추가로 ‘얼마나 열심히’를 덧붙인다면 더 삶이 딱딱해지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래서, 열심히 하지 말라는것이냐’라고 반문이 나올수 있습니다. 열심히 해야죠. 열심히 하게 됩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시락 싸들고 나와서 합니다. 운동에 미친 사람들은 모든 여가를 거기에 쏟을 정도로 열심히 합니다. ‘좋아한다’, ‘미친다’는 ‘한다’가 아니라 ‘따른다’입니다. ‘따른다’라는 것을 추구한다면 거기에는 결국 행동이 동반되게 됩니다. 둘 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쪽은 딱딱한 삶이고 한쪽은 부드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형태가 자유롭습니다. 그만큼 생명력이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리타분한 문장들이 아니라 오늘 나를 이끄는 생명력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이 지금의 나에게 적용될 때 오늘도 살아있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영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있는 오늘과 살아있는 내일과 살아있는 모레가 합쳐져갈 때 영원히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

‘따른다’는 것은 특정한 형태를 요구하는 것 이상을 추구하게 됩니다. ‘따른다’는 것은 방향성을 요구합니다. 속도는 더딜 수 있습니다. 중간에 다른길로 빠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맨발로 갈때도 있고 차를 타고 갈때도 있습니다.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응용이 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때론 주저앉고 한눈팔고 옆길로 새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의 길로 돌아와 먼저 가신 예수님의 길을 다시 따릅니다. 오늘의 나에 실망하지 않고 내일의 나를 격려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했다’, ‘못했다’에 매이지 않고 ‘따른다’, ‘추구한다’를 붙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방향을 추구하면 ‘한다’는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묵상하며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마디 :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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