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민 인생소감

크기변환_lamb-739169_1920

저는 1980년 2남중 장남으로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 모두 모태신앙으로 아버지는 가정과 교회와 사업을 능력있게 감당하셨고 어머니는 가정과 교회를 충실하게 섬기셨습니다. 어릴때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성장하였는데 5살 때 근육무력증이 발병하여 서울대병원에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서 근전도검사를 하였던 끔찍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7세까지 검사를 받으러 몇군데 대학병원에 다녔는데 아버지는 기약없는 몸의 재활로 병원에서 인생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사회에서 부딪히며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여, 이후부터 병원에 가지 않고 학교생활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저는 말이 많고 쾌활한 성격으로 친구도 많았고 선생님과도 관계가 좋았고 인기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대표로 독서대회에 나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다른 반 선생님이 ‘저런 애는 나가면 안된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일을 통해 나는 남들과 다르구나 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 일을 제외하고는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명문중학교에 들어가 전교부회장을 하기도 하였고 명문고 인천고에 들어가서도 반장과 부반장을 줄곧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저와 같은 병이었지만 능력있는 사업가요 교회에서는 목사님을 잘 보필하는 장로로 인정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극동방송에 2번이나 나가 간증을 하기도 하였고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장관상 등도 받고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쾌활하고 말도 잘하고 가정적이며 능력있는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사춘기때는 의견충돌로 많이 다투었습니다. 나도 건강하면 능력있게 살 수 있었을텐데 생각할 때 슬픔과 원망이 터져나와서 아버지와 다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희생적으로 저를 비롯한 가족과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중고등학교때 정성스럽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셨고, 자율학습 시간에는 따뜻하게 먹도록 찬합에 저녁식사를 준비해오시곤 하셨습니다. 유명 메이커옷을 좋아하는 제가 요구하는 옷들을 때마다 사다 날라주셨고 까다로운 아버지와 저의 취향에 맞춰 섬겨주셨습니다. 대학때에는 1주일마다 인천과 서울을 오고가며 데려다주는 수고를 감당해주셨습니다.

남동생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착하지만 공부도 못하고 능력없는 것을 보며 무시하였습니다. 건강한데 왜 저렇게 밖에 못하나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판단하였습니다.

고2때 학교를 휴학하고 기도원에 가서 병을 치유하고자 소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모태신앙이지만 아무런 감응없이 다니던 교회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몸은 조금 괜찮아진듯 했지만 다 낫지 않았고 결국 다시 복학하였고 감사한 마음 한편에 실망과 서운함이 남았습니다.

복학후에 학교생활에 다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아버지보다 좋은 대학에 가고자 하는 오기로(아버지는 평생 책한번 안보시고 놀다가 한달공부해서 건국대에 들어갔습니다!!!) 공부했고, 결국 서강대 법학과에 2000학번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가까운 인하대에 가기를 기도하셨지만 성적이 좋았던 저는 서울에 있는 크고 멋진 대학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편한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작은 대학인 서강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가서 좋아하는 연애도 하고 싶었고 좋아하는 고딕메탈도 실컷 듣고 싶었습니다. 막상 대학교에 들어오니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3명의 여자들에게 대시했지만 거절당해서 나는 여자와 인연이 없구나 생각되었습니다. 학교도 작고 좋아하는 야구부도 없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법학공부를 해야 하는 학교도 싫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수업에 잘 못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고 어떤 때는 술먹고 오후 늦게 일어나 수업은 못듣고 동아리활동으로하는 음악 DJ만 하고 하숙집에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이기나 술이 이기나 20일 동안 술을 마시다가 대낮에 학교계단에서 구른적도 있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여 레코딩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에 홍대 락 공연 클럽에 가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즐거웠습니다. 2학년과 3학년때는 학교 축제때 아는 지인들을 동원하여 밴드공연을 하여 라디오헤드의 CREEP 을 부르기도 하였고 연속해서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였습니다. 이런 저를 친구들은 서강대 사회과학대 음악과라고 별명을 지어주며 특이한 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덕분에 학점은 선동렬 방어율 이었고 3학기 연속 학사경고를 받아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고 친구들도 모두 군대에 가서 외로운 마음에 2학년 2학기부터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법학은 적성에도 안맞기에 독일, 프랑스, 중국문화, 종교학 등 다양한 타학과 수업을 들었고 성적을 어찌하든지 끌어올렸습니다. 내친김에 성적으로는 받기 힘든 장학금을, 교직원과 교수님께 부탁하고 아양과 친분을 쌓고 사정을 하여 추천 장학금을 5번 탔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UBF 말씀공부에 오게 된 것은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수업을 마치고 빈강의실에 앉아있다가 설문조사하러 온 레베카 목자님과 만나서 2학기부터 말씀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옥에 갈까 두려워하는 마음에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정통 기독교이신 부모님이 성경공부를 반대하셨지만 리포트를 써주셨기에 리포트의 유혹에 끌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성경공부를 계속하고 예배에도 참석하였습니다.

4학년 졸업시험을 준비하면서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양식을 먹고 새벽기도도 하고 소감도 쓰면서 준비하였습니다. 1차에는 떨어져서 눈물을 흘렸지만 1주일 쉬고 바로 다시 열공모드로 돌입해서 2차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성적으로 패스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2월 영광의 졸업을 하였습니다. 졸업후에는 본격적으로 레코딩엔지니어의 꿈을 이루고자 홍대 헤비메탈 스튜디오에서 견습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5월에 선거법 개정으로 아버지 사업이 큰 위기를 만나 힘들어졌습니다. 수입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고 돈에 예민한 저는 집안이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심히 두려웠습니다. 엔지니어 실습을 하면서 마이크나 엠프도 들지 못하는 몸과 생각만큼 재능이 없고 평범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며 불안한 장래로 인해 인생의 회의가 들었습니다. 저는 불면증이 생겨서 하루에 1시간도 못자는 악몽과 같은 생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도 침체되어 1:1과 예배도 쉬고 있었던 제게 인생은 온통 암흑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제게 목자님은 멕시코의 박이삭 선교사님이 제게 선물로 보내주신 축구유니폼을 들고 오셔서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롬1:21-23 말씀이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고 감사함도 없이 살았던 저는 허망한 생각과 어두운 마음이 되어 있었고 고딕메탈이라는 음악이나 들으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내 인생을 내 힘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고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자로 살고자 자진 결단하고 여름수양회때 대표소감을 감당하였고, 수양회때는 그림자 연극 음향을 도우며 UBF에 남아서 동역하고자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름도 ‘최감사’로 새롭게 받았습니다.

1년동안 천만원의 돈을 들이며 레코딩엔지니어 공부를 한 결과 그것을 해서는 밥먹고 살수 없고 저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취업을 위해 공무원, 방송국취업등을 준비하기도 하였지만 저의 몸으로는 직장생활 자체가 무의미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어, 컴퓨터로 아버지 사업을 도와드리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 1월부터 센타에서 거주하다가 봉와직염에 걸린 후에는 목자님댁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목자님가정 형편이 어려워져서 레베카 목자님이 과외와 학원일 등으로 바빠지면서 저는 에스더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에스더를 처음 만났을때는 낯을 많이 가리는 에스더가 저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함께 집에 살면서 많이 대화하고 장난도 치고 공부도 도와주면서 저는 에스더의 오빠와 친구가 되어 주었고 에스더는 저에게 저녁밥을 차려주고 간식을 챙겨주었습니다. 싸우기도 하면서 많이 친해지고 저에게 에스더는 동생같이 되었습니다. 또 센타 목자님 자녀의 사탐과외를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2011년 9월부터는 아버지가 알려주신 아이템으로 레베카 목자님과 인터넷 의류판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바쁘고 목자님과도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돈도 벌고 모으며 한 사람으로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삶의 의미와 보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들도 선물해드리고 일본여행도 3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다녀오면서 에스더가 일본에서 제빵을 배우고자 하는 구체적인 비전을 갖게 되었고, 저 또한 UBF세계선교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매년 단기선교로 다녀오고자 하는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의 삶이 할 일없이 무위도식하는 삶에서 자립적인 사업가가 되었고 여러 도전할 일들이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결혼에 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한 몸은 주시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신 것을 깨달으며 결혼의 소망도 이루어주지 않으실까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소망을 내비치며 목자님들이 뭔가 해주시길 기대했지만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는 듯하자 섭섭한 마음이 들어 2014년8월부터 1년여간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년여만에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2015년 9월부터 다시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37년여간의 삶을 돌아보며 저는 시편23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장애인이라는 신체적 핸디캡으로 사회적 약자로 살아야 하는 저를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저의 일생을 책임져줄 수는 없기에 항상 근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이었기에 내가 원하는 학교로 우선적으로 갈 수 있는 혜택을 받아 명문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학교임원까지 하며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고, 명문대 법학과에도 당당히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서강대에서 목자님을 만나서 살길을 예비하시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자립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역량으로까지 자라게 되었습니다. 사업하며 힘들기도 하고 실내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지나고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고 기쁨을 주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에게 부족함이 없이 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앞으로 UBF 목자로서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pastureland-1680_640

One thought on “최장민 인생소감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