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수양회 말씀-5]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말씀/마가복음 8:27-38 요절/마가복음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 시니이다 하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 되십니까?
첫째, 말씀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악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이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왜 권세가 있고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서기관들은 율법을 기록하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에게 “탐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가르쳤지만, 사람 속에 있는 탐심, 간음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 안에 있는 그런 더러운 것들을 없애 주셨습니다. 그 날 그 회당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이에 더러운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시니 곧 바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살고 있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행동을 제어하려고만 했습니다. 행동을 제어하려고 사나운 짓을 못하게 쇠사슬로 묶고 발을 쇠고랑에 채웠습니다. 오래 전에 충청도 어느 곳으로 여름수양회를 갔었는데, 거기 발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처음 봐서 놀랬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쇠사슬에 묶여 얌전히 있었으나 본문의 이 사람은 쇠사슬을 끊고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 대해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더러운 영들을 보셨고, 그 영들을 쫓아내셨고 그는 정신이 온전해졌습니다.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할 때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향해 “더러운 영들아, 나오라.”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 안에 있는 욕심, 음란함, 경쟁심과 시기심 등에게 “나오라.” 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 안에 있는 이런 악이 쫓겨나가면 내 행동도 바르게 됩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사람에 대해서 겉 행동을 바로 잡으려고 애씁니다. 겉 행동을 바로 잡으려고 여러 가지 제어장치를 둡니다. 게임을 절제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하루 한 시간만 게임을 해라, 그 일을 지키지 못하면 용돈을 깎겠다 등 여러 제어장치를 둡니다. 그런 제어장치가 통합니까? 우리의 마음과 눈이 예수님께로 향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에서 이런 악한 것들을 없애십니다. 그러면 행동도 바르게 됩니다.
둘째,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 곧 온 몸이 마비된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들이 용서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니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그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들에 눌려 온 몸과 마음이 다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비를 풀 수 없었습니다. 율법도 그를 마비로부터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마비된 그 사람을 보고 항상 판단했습니다. 그 사람도 항상 자기를 판단,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를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들이 용서되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또 내적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시는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이요, 병든 레위 마태를 고쳐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마태가 병들었을 때는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되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추고 건강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께서 내 죄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면 죄로 인한 마비가 풀립니다. 병이 치료되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사람들은 내 죄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나도 나 자신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판단하고 정죄할수록 마음과 몸이 마비됩니다. 제가 목자생활을 할 때 한 목자가 있었는데, 그는 목자로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자생활이 쉽지 않았고, 수학과 박사과정 공부도 힘들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자매와 결혼해서 도움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관악 3 부 자매와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의 어려운 내적 상태를 잘 알지 못하고 그가 관악 1 부 자매와 결혼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제게 한 장의 편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바울 목자에게 사랑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목자님이 사랑의 목자가 되면 그 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 때 저는 다른 센타와의 경쟁심 때문에 마음이 많이 어두웠습니다. 제 안에 있는 경쟁심, 시기심이 제 마음을 어둡게 하고 굳고 딱딱하게 만들었습니다. 힘든 목자를 제대로 도울 수 없었습니다. 죄가 사람의 마음과 삶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들이 용서되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이 죄로 마비된 사람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UBF 한국 대표이신 김다윗 목자님은 힘이 넘치십니다. 힘이 너무 넘쳐서 도리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 때는 자신에 대한 슬픈 생각 때문에 마음과 몸이 마비되어 무기력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이 그 분을 일어나게 하셨고, 그는 월남전의 용사가 되었고, 그 후에는 많은 연세대학생들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이번 선교사수양회 때 연희센타 출신 선교사들이 100명이 넘게 참석했습니다. 그 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셋째, 항상 돌보십니다.
어느 날 오후 늦은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었을 때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배 뒤편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상관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무시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게 된 그 상황을 모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광풍 속에서 죽게 되었는데도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시더니 정작 자기들이 죽게 되었을 때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섭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비록 주무시지만 제자들을 돌보고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겉으로는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아 보여도 제자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지키고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주무시면서도 제자들을 지키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항상 돌보시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광풍이 아무리 심하고 그 광풍 속에서 죽을 것 같아 보여도 자기 사람들을 돌보시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는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격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신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 않게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본문의 제자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돌보신다면 광풍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거나, 혹 광풍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이 깨어계셔서 제자들을 안심시켰어야 하지 않습니까? 허선교 목자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암이 안 생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광풍 속에 그냥 버려두셨습니다. 그렇게 하셨으면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광풍 속에서 주무시면서 제자들을 광풍 속에 그냥 두셨습니까? 다윗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 왜 다윗으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게 하셨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까? 사울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왜 막아주지 않으셨습니까?
진짜 믿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풍이 불 때마다 일일이 다 막아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일까요? 광풍이 불어대고 겉으로 예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 아닙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믿는 것이 진짜 믿음 아닙니까? 그런 믿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아닙니까?
넷째, 믿음을 키워주십니다.
마가복음 5 장에서 예수님은 혈루증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 여자에게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혈루증이 나으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자를 찾았을 때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혈루증 가진 부정한 손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를 판단하고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율법적인 생각, 곧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라는 율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여전히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내가 잘못했다, 나는 판단 받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있었습니다. 믿음과 율법, 믿음과 정죄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자는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런 여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만 보셨지, 율법적인 것은 전혀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섞여 있는 율법, 율법에서 온 판단과 정죄를 없애주셨습니다. 그 여자에게서 오직 믿음만이 남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이 여자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동안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이 죽었습니다.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는 것만 해라.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대로 딸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딸을 살리실 믿음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염려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딸을 살릴 수 있을까?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내 믿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까? 나는 정말 예수님을 믿고 싶어, 그런데 믿는다고 죽은 딸이 살아날까?
그런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마음속의 믿음을 보셨고 또한 두려움도 보셨고 두려움을 잘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심으로 그 마음의 두려움을 없애시고 믿음만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키워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야이로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나의 믿음을 키워주십니다. 내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있지만, 동시에 율법적 생각, 거기서 오는 판단과 정죄도 있습니다. 믿음도 있지만 염려와 두려움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 자신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나의 믿음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를 잘 아십니다. 그리고 믿음만 보십니다. 믿음만 남기십니다. 믿음을 키워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섯째, 버려지고 죽임 당하십니다. 그리고 살아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려지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한다.”
‘인자’는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인데, 특히 인성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데 인자로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말씀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자기 사람들을 항상 돌보십니다. 자기 사람들의 믿음을 키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지 않으시고 용서로 사람을 살리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왜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 당하셔야 합니까? 만일 예수님이 자신의 가르침이나 하실 일을 두고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타협하셨더라면, 예를 들어 세리나 죄인을 용서하고 고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정죄하고 잘라내셨더라면, 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않으셨더라면, 또 식사하시기 전 손을 씻었더라면 예수님은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지 않았을 것이요, 죽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자기의 가르침, 할 일을 굳게 지키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서의 가르침이요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려지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죽임 당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는 그리스도로서의 가르침, 할 일들이 예수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나라의 70년, 80년 대 많은 청년들이 민주화 사상을 위해 버려지고 죽임 당했습니다.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민주화 사상이 자기들 목숨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예수님은 군대귀신 들린 한 사람에게서 군대처럼 많은 귀신들을 내쫓아 주셨고, 그 한 사람의 정신을 온전케 해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그 사람은 집에서나 사회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한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 군대 귀신을 쫓아내어 그의 정신을 온전케 하는 그 일을 예수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는 곧 그 한 사람을 예수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심으로 그 여자의 믿음을 키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그 한 여자의 믿음을 키워주시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한 사람 야이로의 믿음을 키워주시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 예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고 죽을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진짜 믿음을 갖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제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는 한 생명이 온 세상보다 더 귀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저는 한 가지를 새로 깨닫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그 마음속의 더러운 것들이 물러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물론 그 사람에게 여러 자기 약점,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의 구원과 믿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버려지고 죽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살아나십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으니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